ㅣ묘패사건 (농촌운동 시작)
오치서숙에 다니던 어느 날, 점심을 마치고 인근을 소요하는 중에 어느 더벅머리 총각이 묘 패를 한 아름 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 총각이 말하길, 3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묘를 쓰고 묘패를 꽂아놓고 난 후, 집이 가난하여 남의 집 머슴살이를 전전하다 이제 돌아와 성묘를 하려고 보니 묘가 많이 써져 있는데, 어느 것이 내 아버지 묘인지 몰라 꽂혀진 묘패를 모두 뽑아가지고 왔으니 내 아버지의 묘패를 가려 달라 하였다.
이에 봉길은 “너의 아버지 묘패를 찾아주는 것은 쉬우나, 이 많은 묘패가 꽂혀졌던 자리를 기억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총각이 털썩 주저앉으며 ‘그 생각까진 미처 하지 못하였다’ 고 말했다. 무식이 자기 아버지 묘를 잃어버린 셈이다.
이에 매우 한탄한 의사는 ‘내가 더 이상 나 자신만을 위하여 학문해서 무엇 하겠나’ 하며 몽매한 국민을 깨우쳐야겠다고 결심하고 오치서숙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ㅣ야학개설 (농촌운동 시작)
글방 선생을 하던 봉길은 일제의 착취가 목적인 미곡증산운동을 장려하기 위하여 세운 진흥회관을 교실로 쓸 수 있도록 개조하고 여기서 농촌부흥을 설계하고 내심 독립을 쟁취하는 산실로 생각하고 이를 부흥원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동네 야학을 개설하였다.
윤 의사의 집요한 살쾡이 정신은 할아버지 윤진영의 ‘내가 난 자식, 손자에게는 절대로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두더지 정신이 윤 의사에게 유전된 것이다.
그는 내가 낳은 아들 손자보다는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해 고생하고 있는 이 현실을 위해 내 철권이 썩으면 무용지물이므로 썩기 전에 이 몸을 던지겠다는 각오로 변하였다
ㅣ농촌부흥운동 (농촌운동 시작)
야학을 하다보니 그의 생각은 점점 더 폭이 넓어졌다.
그는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못 사는 원인을
1. 배우지 못하고
2. 가난하고
3. 단결력이 부족함
에서 연유했다 생각하여 무지함과 가난을 몰아내고 단결력을 돋우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활동을 요약하면,
1) 무식을 몰아내는 운동(야학)
2) 가난을 몰아내는 운동(부흥운동)
3) 국민이 단결하는 운동(월례 강연회) 으로 확대되어 갔다.
의사가 농촌 운동을 한 것은 협동 운동이요, 전적(全的)운동이요, 생명창고 지키기 운동이다.
- 의식계몽운동: 농민독본 교재편성, 야학, 윤독회, 남녀공학 실천, 월진회 조직 및 운동, 수암 체육회, 학예회
- 협동운동: 두레권장운동, 위친계고직, 품앗이 권장
- 경제운동: 수내제도 권장, 공동구매사업(소비조합운동), 농사지도, 저축지도
ㅣ학예회 (농촌운동 시작)
일 년에 한 번 학년 말에 학예회를 열었는데 마지막 학예회의 연극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토끼’ 였다.
학예회가 끝난 뒤, 소문이 인근에 퍼져 주재소에서 의심을 사게 되었다.